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대구大丘서씨와 달성達城서씨의 연원淵源은 두 서씨의 옛 문헌에 의하면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달성(현 달성공원)에서 발원하여 그 근원이 같습니다. 이 결론은 임오보가 고증하고 있습니다. 다만 두 계통으로 분파分派된 시기와 양파兩派의 계대系代를 아직 확실히 고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두 파는 1702년(肅宗 28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습니다.
아래의 한문은 대구서씨가 주관하여 간행한 임오보에서 판도공파(현재의 달성서씨) 계보 서두에 기록된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版圖公派亦系達城必是同貫而世代已遠譜牒無徵未能明知故不敢渾錄於本譜姑爲別譜以附篇末―
국역하면―판도공파 역시 달성으로 계보하니 필시 같은 관향인데 세대가 이미 멀고 보첩으로 증명할 수 없어 능히 밝게 알지 못하므로 감히 본보에 섞어서 기록하지 못하고 잠시 별보로 하여 책끝에 붙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대구서씨가 그 근원을 달성에 두고 있는데 판도공파 역시 그 근원을 달성에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래의 한문은 소윤공 묘표의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高麗朝奉大夫軍器少尹徐公墓表陰記 고려조봉대부군기소윤서공묘표음기―
―大興郡之近東面炭坊里負癸之原高四尺者麗朝軍器少尹徐公諱閈字仁里之墓也淑夫人金氏祔焉公籍大丘府之達城寔爲吾宗遠祖…이하 생략―
국역하면―대흥군 근동면 탄방리 계방을 등진 언덕에 높이 4척되는 봉분은 고려조에서 군기소윤을 지낸 휘가 한이고 자가 인리이신 서공의 묘이다. 배配 숙부인 김씨도 여기에 합장하였다. 소윤공의 관적은 대구부의 달성이니 이 분이 우리 종파의 원조이시다.…이하 생략―
이와 같이 대구서씨 원조 소윤공 묘표에서도 대구서씨의 관적이 대구부의 달성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달성(고대에는 기록에 의하면 달벌 달벌성 달구벌 달구화 등으로 불림)은 조선 세종때에 대구현을 달성군으로 승격할 때부터 나타난 지명이기도 하지만 대구大邱 중구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로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주위를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고려시대부터 徐氏가 세거世居하고 있었는데 조선 세종조에 이르러 구계 서침(龜溪 徐沈) 선생께서 달성에 거居하실 때 조정에서 달성이 나라에 필요하다 하니 구계선생께서 달성을 나라에 헌납하시어 달성이 국유지가 된 이래로 현재의 달성공원을 말합니다. 선생께서는 달성 토지의 보상을 사양하시고 대구 읍민의 상환곡 이자를 한 섬에 다섯되씩을 감면해 주시기를 주청하시니 조정에서 특별히 허락하여 조선말까지 읍민이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적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대구읍지에 그 기록이 있습니다. 이 대구읍지는 대구광역시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대구大丘라는 지명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경덕왕 16년(757년) 겨울 12월에 전국을 구주九州로 개편하면서 양주良州에 속한 수창군壽昌郡의 속현屬縣인 달구화현達句火縣을 대구현大丘縣으로 고쳐서 생긴 것이고 고려 때도 그대로 대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삼국사기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구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수백 년 동안 사용한 지명이어서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었고
달성은 대구부府에서 서쪽으로 4리에 있고 서씨 일족이 세습世襲하여 살고 있는 일개 토성土城에 불과하였으므로 대외적으로는 달성의 지명도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지방 사람이 서울에 가서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자기가 속한 도시의 지명으로 소개를 하지(예를 들면 대전에 산다 혹은 대전 사람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이 고려나 조선 초에 널리 세상에 흩어진 후손들은 자기를 소개할 때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대구를 관향으로 소개를 하였고 그 결과로 관향이 대구로 굳어진 것입니다. 위와 같은 연유로 문헌을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두 계파가 공히 본관을 대구로 사용하였고
조선시대부터 두 계파의 구성원들이 본관을 대구 또는 달성을 혼용해서 사용하였는데
본관을 혼용하여 쓰게 된 이유는 대구 지명의 변천(달벌達伐·달벌성達伐城·달구벌達句伐·달구화達句火→대구大丘→달성達城→대구大邱)에 따른 것입니다.
근래부터는 두 계파가 족보 제호에서 본관을 대구와 달성으로 각각 따로 쓰고 있습니다.
대구서씨는 원조遠祖를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휘 한閈으로 계보하였고
달성서씨는 원조遠祖를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진晉으로 계보하였습니다.
두 서씨가 근원이 같은 후손인데 원조를 달리 한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문헌의 민멸로 인하여 현재 나타난 문헌으로는 소윤공과 판도공의 계대系代를 정확히 고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원이 같은 후손들이므로
대구서씨에서는 달성서씨를 지칭할 때 원조의 관직을 따라서 판도공파라 하기도 하고 또는 향파鄕派라 하기도 하며
달성서씨에서는 대구서씨를 지칭할 때 원조의 관직을 따라서 소윤공파라 하기도 하고 또는 경파京派라 하기도 합니다.
판도공파를 향파라고 칭하는 것은 晉의 후손들이 주로 고향인 대구에서 번성하였기 때문이고
소윤공파를 경파라고 칭하는 것은 閈의 후손들이 주로 서울인 경성에서 번성하였기 때문이며 그 대표적인 예로는 시충숙공諡忠肅公(휘서성諱徐渻/호약봉號藥峯)의 후손 중에 기라성 같은 인물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세간에서는 서지약봉이요 홍지모당(徐之藥峯洪之慕堂)이라는 말도 생겼는데 이 말은 "서씨 중에는 약봉의 자손들이 잘 되었고 홍씨 중에는 모당 홍이상(慕堂洪履祥)의 자손들이 잘 되었다" 는 뜻입니다.
특기할 것은 고려와 조선의 각 문헌에 달성서씨 인물들의 관향이 거의 대구大丘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조선조 방목 등 각 문헌에 대구서씨 인물들의 관향이 달성으로도 많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서씨의 관향이 행정 지명으로는 대구大丘여도 그 근원이 대구중에서도 달성이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계파는 대구서씨인데도 호적에는 달성서씨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고
계파는 달성서씨인데도 호적에는 대구서씨로 등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기한바와 같이 두 서씨의 구성원들이 과거에 본관을 혼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임오보에서는 서씨 두 계파의 관계에 대하여 必是同貫(아마도 틀림없이 같은 관향일 것이다) 혹은 一鄕之徐分爲兩派似無是理(한 고을의 서씨가 나뉘어 두 파가 되니 이런 이치가 없을 것 같으나) 등의 문장으로 두 계파의 동근同根을 단언斷言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임오보 이전의 서씨 옛 족보의 기록을 언급하면서 其源同一派也라고 잘라 말합니다.
이제 모두冒頭의 결론에 대한 근거를 아래의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아래의 한문은 임오보 부록의 원문 일부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按譜徐有二派一則達城君徐穎之後一則判典客寺徐益進之後其源同一派也姑錄于此以爲他日考證之地…생략―
국역하면―…족보를 살펴보면 서씨는 두 파가 있는데 하나는 달성군 서영의 후손이고 하나는 판전객시사 서익진의 후손인데 그 근원은 같은 한 파이다. 잠시 여기에 기록하여 후일 고증의 바탕으로 삼는다…생략―
위 원문의 첫머리를 보면 按譜―족보를 살펴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임오보를 만들 당시에 임오보에 앞서 서씨의 옛 족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족보에 서씨의 두 계통이 근원이 같다고 하였으므로 그대로 임오보에 기록하니 후일 고증의 바탕으로 삼는다. 이 말은 양파의 근원이 같으니 후일에 분파된 시기와 양파의 계대를 고증할 때 참고하란 뜻입니다.
임오보를 살펴보면 참으로 애석하게도 대구서씨 원조遠祖 소윤공 아래로 5대가 실전失傳이 되고 7대부터 기록이 나타납니다. 이 실전된 5대가 나타나거나 혹은 북한에 소재하는 판도공의 묘비석을 볼 수 있다면 필시 소윤공과 판도공의 계대가 고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만성보萬姓譜에는 한(閈)은 진(晉)의 증조(曾祖)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만성보의 기록을 신봉합니다.
신축(2021) 중추절 달성서씨 23世 聖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