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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1574년(선조 7)에 '옥산()'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전국 47곳의 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할 때에 훼철되지 않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무변루

무변루

옥산서원 강당 구인당에서 내다본 동재와 서재, 그리고 무변루.

회재는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호를 '회재'라 한 것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호인 '회암()'에서 '회()'자를 취함으로써 주희의 학문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재의 성리학은 그 후 퇴계에게 이어진다. 회재는 1610년(광해군 2) 9월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동방오현()'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조선조 도학()의 우뚝 선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회재의 고향은 경주 양동마을이다. 회재는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의 한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사랑채 독락당()과 정자 계정()을 경영하고 자연을 벗삼으며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옥산서원이 창건되었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독락당 주변 청절()한 냇물을 끼고 있는 바위 다섯 곳에 각각 관어대()·탁영대()·세심대()·징심대()·영귀대()라 이름한 오대() 중 세심대에 위치하고 있다.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세심대

세심대

옥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계곡의 너럭바위 세심대는 이 계곡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라는 성리학적 의미를 지녔다.

옥산서원은 서향을 했는데, 동·서·북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트여 있다. 서원에서 정면인 서쪽 앞으로 마주보이는 산은 무학산()으로, 북쪽의 자옥산()에서 갈라져나온 맥이다. 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2층 다락 건물인 무변루()에 이르게 된다.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의 작은 내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흐르게 한 서원의 명당수이다. 역락문은 『논어()』의 「학이()」 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에서 취한 것이다.

옥산서원 배치도

옥산서원 배치도

무변루는 정면 7칸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며, 그 밖으로 좌우의 각 1칸에는 퇴칸처럼 덧붙인 누마루가 조성되어 서원 쪽으로는 강당 앞마당이 처마 사이로 보이고, 서원 밖으로는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와 건물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 없는 듯하다.

무변루 대청은 외부 쪽으로는 벽체를 설치하고 판문을 달아 공간의 트임과 막힘을 제한하는 한편, 강당 쪽으로는 창호를 달지 않고 트이게 하여 내부 지향적인 공간 구성을 하였다. 무변루는 외삼문에서 보면 2층이지만, 강당 쪽에서는 위층만 보인다.

무변루를 마주보고 있는 강당 건물인 구인당()과 그 앞 좌우의 동재와 서재가 강학공간을 이루고 있다. 구인당은 가운데 3칸이 대청마루이고, 왼편과 오른편 협실은 온돌방이다. 구인당에서 앞마당을 가로질러 무변루 밖으로 멀리 무학산을 바라보면 자연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인당의 '구인()'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을 '구()'하는 데 있다는 회재 성리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로, 회재의 저서 『구인록()』에서 취한 것이다.

강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 1786∼1856)의 글씨이고, 강당 대청 전면에 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창건 당시 사액받은 편액으로 아계() 이산해(, 1538∼1609)의 글씨이며, '무변루'와 '구인당'의 편액은 석봉() 한호(, 1543∼1605)의 글씨이다.

구인당

구인당

강학공간의 중심 건물인 구인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구인당 앞마당 좌우에는 동재인 민구재, 서재인 암수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독락당

독락당

회재 이언적인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 곳이다.

구인당 뒤에는 내삼문인 체인문()이 있고, 그 뒤에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사당인 체인묘()와 전사청이 있다. 체인묘의 '체인()'은 어질고 착한 일을 실천에 옮긴다는 말로, 성리학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다. 사당 담 밖 왼쪽으로는 경각()이, 오른쪽으로는 신도비각()이 있고, 서원 영역 왼쪽으로는 고직사, 포사, 문집판각 등이 있다.

옥산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정문에서 차례로 문, 누, 강당, 사당 등이 일직선을 이루는 중심축 선상의 마당을 중심으로 각각 고유의 영역을 구성하며 공간의 켜를 만들고 있다. 기하학적인 구성을 이루면서도 주변 자연 경관과 어울리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무변루, 구인당, 체인묘 일대의 외부공간은 전체 배치의 구심점이 되어 개별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영역 사이로 스며드는 공간의 엇물림, 그리고 중첩되는 지붕선과 담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은 옥산서원 건축공간의 특성을 읽게 해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옥산서원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2004. 11. 30.,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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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석훈 2019.09.19 16:07
    옥산서원에서는 春享은 2월 中丁日, 秋享은8월 中丁日에 享禮를 올립니다. 지난 17일이 8월 中丁日이라 향례에 참석차 전일인 16일에 入齋하였습니다. 17일 새벽1시(丑時)에 행사가 시작되어 음복까지 마치니 4시가 가까웠습니다. 모든 절차가 대구 지역보다는 훨씬 고례를 따르는 점을 배우고 왔습니다. 曹司의 소임을 받아 분정기를 쓰는데 처음하는 경험이고 유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쓰니 긴장되어 뜻대로 붓끝이 움직이지 않더군요. 자질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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