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
필암서원(筆巖書院)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높은 절의(節義)와 학문을 숭앙하기 위해 그의 문인들이 1590년(선조 23)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기산리에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그 후 두 차례 이건되었다. 첫 번째는 1624년(인조 2)에 기산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증산(甑山), 현재의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증산마을로 이건되었다. 그 후 1662년(현종 3) 조정으로부터 '필암서원'으로 사액을 받으면서 토지와 노비 등이 지급되었는데, 필암서원이 서원의 규모를 갖추고 제 기능을 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필암(筆巖)'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하서의 고향인 맥동에 붓처럼 예리한 형상의 바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건된 곳은 현 위치인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원필암마을이다. 1672년(현종 13)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물난리로 증산의 흙다리가 위험해지자 해타리(필암리의 옛 이름)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필암서원에 주벽으로 모셔진 하서는 고고한 절의와 맑고 깨끗한 인품을 지닌 도학자였다. 그는 어릴 적에 이미 사물을 궁구하는 도학자의 면모를 보였는데, 그에 대한 놀라운 일화가 전해온다. 다섯 살 때, 하서는 날파 하나를 놓고 한 껍질 한 껍질 벗기면서 그 속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마지막 고갱이를 알아내고는 손을 놓았다. 이를 본 아버지가 쓸데없는 장난이라며 나무라자, 하서는 "생겨나오는 이치를 알아보고 싶어서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18세에는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1483∼1536)를 찾아가 학문을 논하였는데, 그로부터 하서의 학문과 인품이 "가을 물, 어름 항아리(秋水氷壺)"와 같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하서는 22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24세에 퇴계 이황을 만나 교분을 맺었으며, 31세에는 문과에 합격하였다.
34세에는 후일 인종(仁宗) 임금이 되는 세자의 시강(侍講)이 되었다. 이때 세자는 하서의 학문과 덕행에 대한 총애와 기대가 지극하여 손수 묵죽(墨竹) 한 폭을 그려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 묵죽은 훗날 하서의 높은 절의를 예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36세 되던 해에 인종이 즉위하자 하서는 큰 기대를 했으나 같은 해 7월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관직을 사양하고 세상과 일체 인연을 끊은 채, 학문을 수양하며 생의 후반을 보내게 된다.
하서는 인종의 승하를 애통해하며 해마다 인종의 기일(忌日)인 7월 초하루에 산에 올라 북쪽을 향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종에 대한 염모의 정을 '유소사(有所思)'라는 시로 읊었는데,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을 잃은 가련한 한 여인의 피맺힌 한으로 분장된 내용이다. 후에 하서의 절의를 높게 평가한 정조는 필암서원에 '경장각(敬藏閣)'이라고 쓴 편액을 하사하였다. 경장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와 묵죽도판이 보관되어 있다.
하서의 절의와 인품은 필암서원의 건물 이름들에 이어져 빛나고 있다. 사당 이름 '우동사(祐東祠)'는 "하늘의 도움[祐]으로 인하여 우리 동방[東]에 태어난 이가 하서 김선생이다"라는 뜻에서 취하였다. 누문 이름을 '확연루(廓然樓)'라고 한 연유는, "정자(程子)의 말씀에 군자의 학(學)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하여 확연히 크게 공정"하므로 이에 우암 송시열이 특별히 '확연'이란 두 글자로 빛나게 하였다고 한다. 강당 이름 '청절당(淸節堂)' 역시 같은 맥락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필암서원을 형성하는 대지는 남북으로 긴 형상을 한 평지인데, 서원 밖에는 홍살문과 하마석, 그리고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서원에는 남쪽부터 북으로 들어가면서 설정된 남북 중심축을 따라 차례로 문루인 확연루, 강당인 청절당, 사당인 우동사가 각기 그 앞에 형성된 마당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