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屛山書院)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다. 서원은 본래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다. 이 서당은 읍내 도로변에 있어 시끄러워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1572년(선조 5)에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 1542∼1607)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서당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7년 재건되었다.
풍악서당이 서원으로 된 것은 1614년(광해군 6) 사당을 건립하고 유성룡의 위패를 모시면서부터이다. 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47곳 중의 하나이다.
병산서원 전경
병산서원은 화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산자락에 남향을 하며 자리잡았다. 서원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이 있다. 병산은 산의 형상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퇴계 이황에게 수학한 서애는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존망(存亡)에 처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1598년(선조 31) 이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河回)마을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 건너 부용대 기슭에 있는 옥연정사(玉淵精舍)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의 전황을 기록한 책이다.
서애는 책 이름 『징비록』을 『시경(詩經)』에 나오는 "미리 지난 일을 징계[懲]해서 뒷날 근심이 있을 것을 삼간다[毖]"고 한 구절에서 빌어왔는데, 다시는 이 나라에 임진왜란과 같은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됨을 후세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징비록』은 서애의 고택인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忠孝堂)의 유물각인 영모각(永慕閣)에 전시되어 있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과는 화산(花山)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병산서원은 화산의 동쪽 기슭에, 하회마을은 그 반대쪽에 있다. '병산'은 강원도 산간 지방을 돌아 나온 낙동강 물줄기가 모처럼 넓게 트인 곳을 만나 센 물살을 만들며 항아리 모양으로 돌아 나가는 강변에 병풍[屛]처럼 산이 펼쳐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원은 병산이 기암 벼랑 밑으로 흐르는 낙동강물에 깊게 그림자를 드리운 절경을 마주보며 자리잡고 있다.
병산서원 배치도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으로 가려면 예전에는 육로로 걸어가거나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넜는데, 요즈음은 버스까지 들어가는 찻길을 주로 이용한다. 그래도 옛 맛을 되씹고 하회마을과 병산서원과의 관계를 제대로 알려면 하회마을에서 논밭을 가로질러 산을 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옛 오솔길이 갖는 맛이 좋고, 산 너머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나 그 앞의 모래사장과 솔밭이 좋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은 세월이 흘러 희끗희끗한 청동색 반점의 기와지붕과 퇴락한 짙은 갈색 나무 기둥들로 찾는 사람들에게 회고(懷古)의 정을 불러일으키며 탄성을 자아낸다. 하지만 실제로 병산서원이 갖는 건축적 빼어남은 다른 곳에 있다.
흔히들 한국건축의 특징을 주변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고 하지만, 그 조화란 이미 있던 자연 환경을 읽어내어 거기에 합당한 건축을 어떻게 잘 앉히고 배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병산서원을 구성하는 건물 자체는 제향을 지내는 사당과 학문을 돈독히 하며 심신을 정진하는 강당, 재사 등 건물들로 되어 있어서 여타 서원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이 병산서원은 성리학적인 원칙에 바탕을 둔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러한 건물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빼어난 공간감을 보여주고 있다.
서원 정문(正門)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못이 있고 맞은 편 한 단 높은 곳에 옆으로 기다랗게 만대루(晩對褸)가 서 있다. 누 밑은 휘어진 자연 상태 그대로의 꾸불꾸불한 기둥이 받치고 있고, 2층 누마루에는 반듯하게 다듬은 기둥들이 사방을 둘러쌌는데 벽은 두르지 않고 트여 있다.
만대루 2층 누마루
만대루 위층 누마루에 반듯하게 다듬은 기둥들이 형성하는 정제된 공간은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 유학의 꼿꼿하고 청청한 맥이 건물에 살아나 있는 듯하다.
이곳에 서면 한쪽으로는 병산과 낙동강이 펼쳐지는 주변 풍광을 다 끌어안을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서원 일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만대루의 '만대(晩對)'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百帝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對)"에서 인용한 것으로, '병산의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서야 대할 만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유식공간인 병산서원 만대루
병산서원 강당인 입교당에서 앞으로 내다본 전경이다. 만대루 2층 누 7칸 기둥 사이로 자연과 건축이 하나로 얽히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강당 건물인 입교당(立敎堂)이 서 있다. 입교당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立敎]'는 뜻에 걸맞게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강당 대청 한가운데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앞쪽을 바라보면, 서원 일대의 경관이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 들어온다. 만대루 2층 누 7칸 기둥 사이로 강물과 병산과 하늘이 7폭 병풍이 되어 얽히며 펼쳐지는 풍경은 한폭의 그림이다. 그것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극적인 공간 분위기를 만들어 바로 나 자신이 자연 가운데에 묻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입교당만대루에서 바라본 입교당과 그 앞의 동재와 서재.
강당 동쪽 옆을 돌아 들어가면, 잘생긴 배롱나무가 심어진 언덕 위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사당인 존덕사(尊德祠)에는 북벽에 유성룡을 주벽으로 모시고, 동벽에 유진(柳袗, 1582∼1635)을 종향(從享)하고 있다. 사당은 강당과 함께 맞은편 병산을 향하고 있는데, 산봉우리를 마주 대하지 않고, 산 능선의 약 7부쯤 되는 곳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건물과 자연이 하나가 되게 하는 한국건축의 특성으로, 산봉우리를 마주보며 향하게 건물을 배치하는 중국건축과 차이를 이룬다.
사당 신문
사당으로 출입하는 신문에는 태극 문양을 그렸고, 길게 다듬은 기둥 초석에는 팔괘를 그려놓았다.
병산서원의 백미인 만대루
정면 7칸에 측면 2칸의 누마루는 유생들과 사대부들이 학문과 열정을 토로하며 우주 질서와 자연 순환을 탐구하던 성리학적 이상향의 공간이다. 건축의 비례와 부재의 적절한 배치가 돋보이고 우물마루에서 배어나는 윤기에서 세월의 힘을 실감한다. 풍광이 시원하여 감탄이 절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