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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

by 徐聖泰 posted Dec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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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내용은 조선 영조44(1768) 경에 간행된 대구읍지(大丘邑誌)의 학교學校 에 실린 기록을 국역하여 원문과 함께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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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學校

구암서원

현판을 하사받지 못했다. 의 서쪽으로 3리 남산 아래에 있다. 현종 을사년(1665)에 사론士論으로 창건하여 구계서선생龜溪徐先生  사가서선생四佳徐先生  함재서선생涵齋徐先生  약봉서선생藥峯徐先生 사현四賢을 봉안하여 합향合享 하였다.

구계 서선생은 휘가 침이고 자는 성묵聖黙이며 대대로 달성에 살았다. 세종 때에 달성과 옛 역터를 맞바꾸고 다시 그 상을 논할 때 선생이 굳이 사양하고 관가에 납부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다섯 되 줄여 주기를 청하고 인하여 남산 고을로 옮겨 살며 몸가짐을 수양하고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며 후학들에게 학문을 장진하였다. 그 후로 선비들이 흠모하여 논의한 뒤에 사당을 세워 주향主享 하였다. 사적은 사당 뜰의 비석에 실려 있다.

사가 서선생은 휘가 거정居正이고 자는 강중剛仲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문형文衡을 이십년간 지냈다. 동국통감 동인시화 필원잡기 태평한화는 모두 선생의 저작인바 세상에 널리 읽힌다. 구암서원에 배향 되었다.

함재 서선생은 휘가 해이고 자는 정지挺之이다. 이퇴계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성리학에 침잠沈潛하였고 겨우 약관에 문장과 덕행을 두루 갖추어 퇴계 선생의 허여許與를 받았고 사림에서 높이 받들어져 귀하게 되었다. 사실에 관해서는 복주의 고명한 선비 이중립이 쓴 뇌문에 갖추어 실려 있다. 구암서원에 병향 되었다.

약봉 서선생은 휘가 성이고 자는 현기玄紀이며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달랐다. 15세 때에 명나라 사신이 와서 나라로부터 황화집皇華集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라는 명이 백부 춘헌에게 내려졌는데 백부가 화답의 시를 짓지 못하자 선생이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백부가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며 선생이 지은 시를 조정에 올리니 문장이 일세를 흔들었다.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어 온 세상을 풍미하였는데 선생이 홀로 상소하여 가로되-인홍은 나라를 망칠 소인이니 청컨대 그 머리를 베어 신령과 사람들에게 사죄케 하소서-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교남(영남)의 안절사가 되어 망우당 곽재우와 더불어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휩쓸어 평정했다. 광해군 때에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 등의 어진 신하들이 죄없이 쫓겨나도 한 사람도 구원함이 없자 선생이 임금을 면대하여 직간하였다. 사업이 국사에 모두 실려 있다.

 

龜巖書院

未 賜額在府西三里南山下 顯廟乙巳因士論刱建奉安四賢合享 龜溪徐先生諱沉字聖黙世居達城 世宗朝以古驛基相換又論賞先生固辭請官糴耗五升因徙居南山村修飾行誼獎進後學其後士林欽慕倡論建祠主享事蹟載廟庭碑 四佳徐先生諱居正字剛仲 諡文忠公文章鳴於世典文衡二十年東國通鑑東人詩話筆苑雜記太平閑話皆先生所作行於世配享 涵齋徐先生諱嶰字挺之受業於退溪李先生門沈潛性理之學才弱冠文章德行優被老先生獎許實爲士林推重事實備載福州高士李中立誄文中幷享 藥峯徐先生諱渻字玄紀 諡忠肅公先生幼孤天資卓異十五歲 天使來自國家皇華集和進之命及於伯父春軒而春軒未有和次先生次韻春軒大加驚異以其製進于 朝家文章動一世鄭仁弘爲大憲擧世風靡而先生獨上䟽曰仁弘亡國小人請斬其頭以謝神人壬辰之亂按節嶠南與忘憂堂同聲倡義掃平南夷光海朝白沙漢陰諸賢竄逐無一人伸救而先生犯顔直爭事業備載國乘

 

현재의 구암서원

구암서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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