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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지역의 명문가 - 달성서씨(봉화일보 발췌)

by 서정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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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達城徐氏)는 시조(始祖) 서진(徐晋)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孫子) 서영(徐穎)에 이르기까지 3대(代)가 달성군(達城君)에 봉(封)해졌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달성(達城)에 세거(世居)하며 관향(貫鄕)을 달성하게 되었으며, 후대(後代)로 내려와 현감공파 서제(縣監公派 : 徐濟), 학유공파 서도(學諭公派 : 徐渡), 판서 공파 서섭(判書公派 : 徐涉), 감찰공파 서근중(監察公派 : 徐近中), 진사공파 서석련(進士公派 : 徐錫蓮), 생원공파 서석명(生員公派 : 徐錫蓂), 진사공파 서석령(進士公派 : 徐錫笭), 참판공파 서종일(參判公派 : 徐宗一), 종사랑공파 서진(從仕郞公派 : 徐震) 등 9파(九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시조(始祖)의 증손(曾孫) 서균형(徐鈞衡)이 1360년 공민왕(恭愍王) 9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해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신돈(莘旽)의 방탕(放蕩)한 횡포(橫暴)를 탄핵(彈劾)하는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았고 잦은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에 대비(對比)한 군(軍)의 중요성(重要性)을 역설(逆說)하였으며, 그의 아들 서침(徐琛)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練馬)하여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後)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냈다.

서침(徐琛)의 아들 3형제(三兄弟) 중 장남(長男) 서문한(徐文翰)은 승사랑(承仕郞)으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을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해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차남(次男) 서문간(徐文幹)은 중시(重詩)에 올라 역시(亦是) 현감(縣監)을 역임(歷任)했고, 3남(三男) 서문덕(徐文德)은 숙부(叔父)인 송화부사(松禾府使) 서습(徐習)에게 출계(出系)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 과 만경현감(萬頃縣監)을 지냈다.

대사간(大司諫) 서충(徐衷)의 증손(曾孫) 서한정(徐翰廷 : 진사(進士) 서균의 아들)은 세종(世宗) 때 진사(進士)로 태학(太學)에서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였고, 1455년 세조(世祖 1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자 이를 개탄(慨歎)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가족(家族)을 데리고 영주 이산면 한성동(榮州伊山面漢城洞)으로 내려가 은거(隱居)하다가 소백산(小白山) 밑 순흥(順興)으로 옮겨 세상(世相)과 인연(因緣)을 끊고 학문연구(學問硏究)에 진력(進力)하며 스스로 호(號)을 돈암(遯庵)이라 불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서중봉(徐重峯) 조헌(趙憲)의 휘하(麾下)로 들어가 금산(錦山)의 전투(戰鬪)에서 칠백의사((七魄義士)와 함께 순절(殉節)한 서응시(徐應時)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선조(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명성(名聲)을 떨쳤던 서사원(徐思遠)은 청안혐감(淸安縣監)에 부임(赴任)하여 학문(學問)의 진흥(振興)과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진력(進力)하였다.

그외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아 주사장(舟師將)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었던 인충(仁忠)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화의(和義)를 반대(反對)했던 서변(?)이 유명(有名)했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에서 선봉수문장(先峰守門將)으로 임명(任命)되었던 후손(後孫) 서수천(徐壽千)은 대나무로 뗏목(筏舟)을 만들어 노량 해전(露粱海戰)에서 무공(武功)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서화(書畵)에 탁월(卓越)하여 <팔능(八能)>으로 일컬어졌던 병오(丙五)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組織)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에 앞장섰던 서상일(徐相日)이, 영친왕(英親王) 결혼식전(結婚式前)에 참석(參席)했던 총독부 요인(總督府 要因)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살해(殺奚)를 기도(氣道)하다 피체(被逮)되었던 서상한(徐相漢 : 상일의 아우)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목렬(穆烈)의 아들 서재승(徐在承 : 종사랑(從仕郞) 서진(서진의 12세손(世孫) 은 일찌기 유학(儒學)에 전념(專念)해 시(詩)와 예학(禮學)에 정통(精通)했으며 효성(孝誠) 이 뛰어나 세인(世人)들의 칭찬(稱讚)을 받았다.

1905년 광무(光武) 9년 통사랑(通仕郞)으로 탁지부주사(度支部州事)이 되었으나 일본(日本)의 침략흉계(侵略凶計)에 의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締結)되자 의분(義憤)을 참지(參知) 못해 의병(義兵)을 일으켜 항일투쟁(抗日鬪爭)에 앞장섰으며, 군자금(軍資金) 조달(調達)을 위하여 고향(故鄕)인 영주(榮州)로 내려가 활약(活躍)하다가 밀고자에 의해 체포(逮捕)되어 서울로 압송도중(押送道中) 영풍군 풍기읍(榮豊郡豊基邑) 창락동에서 일본헌병(日本憲兵)과 격투(激鬪)하다가 40세로 순절(殉節)하였다.

그후 그의 충절(忠節)을 기려 사림(士林)에서 충의(忠義)라 사시(私諡)하였고, 1980년 8월 14일 대한민국건국포장(大韓民國建國褒章)이 수여(授與)되었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죽림(竹林) 서재승(徐在承)의 장손(長孫) 서병극(徐丙極)이 전국(全國)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에 의해 사업비(事業費) 일체(一體)를 전담(全擔)해 경북 영풍군 단산면 사천리(慶北榮豊郡丹山面沙川里)에 백산서원(白山書院)을 건립(建立)해 전사청(典祀廳)을 비롯한 부속건물(附屬建物)을 세우고 경내(境內)의 조경(造景)과 진입(進入)로 공사(工事)를 완료(完了)하여 선조(先祖)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다.

본군(本郡)에는 이들 방후손(傍後孫)들이 봉화,물야(奉化,物野)를 비롯하여 전역(全域)에 살고 있다.

서정슬(徐庭瑟) 1921년생(年生)으로 물야(物野)압동에서 출생(出生)하여 대학(大學)를 졸업(卒業)하고 성창기업(盛昌企業)주식회사(株式會社)사장(社長)를 역임(歷任)했다.

서석호(徐錫鎬) 1928년생(年生)으로 물야(物野)압동에서 출생(出生)하여 부산대(釜山大)경영대학원(經營大學院)를 졸업(卒業)하고 성창기업(盛昌企業)주식회사(株式會社)상무(常務), 한국(韓國)요업(窯業)주식회사(株式會社)사장(社長)를 역임(歷任)했다.

서정달(徐庭達) 1932년생(年生)으로 봉화해저(奉化海底)에서 출생(出生)하여 경북대(慶北大)농대(農大)를 졸업(卒業)하고 재산면장(才山面長)을 역임(歷任)했다.
출처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이흥선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