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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서씨 포죽도>와 화산관 이명기의 그림 세계

 

도 병 훈(작가)

 

 

내 고향 마을 어귀에는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유서 깊은 ‘백죽각(白竹閣)’이 있다. 백죽각은 이름이 뜻하듯 ‘흰 대나무’에 얽힌 사연을 담고 있다.

대나무는 옛날부터 소나무와 함께 동북아 문화권에서 그 기품 있는 자태로서 한 겨울 눈서리에도 한 결 같이 푸름을 지키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한다. 나의 선조 중에도 이 대나무를 뒤뜰에 심어놓고 늘 즐겼던 사람이 있었으나, 20대 초반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그의 젊은 부인이 대숲에서 오랫동안 슬피 울었으며, 수 십 년 후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흰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한다. 고향 문중에는 이러한 사연을 담은 그림이 전한다.

지난 1996년 추석 무렵에 이 그림을 보았는데,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 1756~1802년 이후)가 그린 <열녀서씨 포죽도烈女徐氏 抱竹圖>였다. 옛 족자를 펼치는 순간, 쪽으로 물들인 청색의 조선식 족자를 배경으로 드러난 그림은 매우 생생했다. 200년 전에 그린 그림으로는 대작인데다 보존상태가 좋았다. 특히 일반적인 전통 한지와는 다른, 표면이 매끈매끈한 종이여서 그림의 필치가 더욱 투명하고 섬세하게 살아있었다. 그동안 공부해온 서구 회화와는 확연히 다른 예술세계를 처음으로 직접 만져보며 대면한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는 이명기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부친이 소장 중인 필사본으로 된 옛 전적에 그가 그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초상화를 잘 그렸던 화가로만 알고 있던 이명기의 작품세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들을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직접 보기도 하고, 동시대 화가들의 그림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이명기의 회화세계를 다룬 선행 연구 논문을 찾을 수 없었다.

지난 2004년 2월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전>을 보러 갔다가 도록을 통해 이명기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강세황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계추기사癸秋記事」1)를 통해 이명기의 태어난 해가 밝혀졌으며, 또한 이명기가 약관 20대부터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다는 것이다.

 

 

<열녀서씨 포죽도>의 내력

 

<열녀서씨 포죽도>는 성주도씨 청송당 공파(靑松堂公派) 군위 성동 문중에 전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입향조 도운봉(都雲峯)의 부인인 열녀 서씨2)의 행적을 담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열녀 서씨는 조선 초기의 열녀였다.『세종실록』에 의하면 열녀 서씨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감사가 말하기를, 군위 사람인 도운봉이 후원에 대나무를 심어놓고 이를 완상하며 즐기다가 죽었습니다. 그 때 서씨의 나이는 28세였는데, 아침저녁마다 대나무를 끌어안고 애모하기를 처음 죽었을 때와 같이 17년간이나 계속하던 중 하루는 흰 대나무가 그 후원에 돋아났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 고대 순임금의 두 비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상수(湘水) 물가에서 슬피 울어서 반죽(班竹)이 난 바 있고, 송나라 앙흔이 부모 곁에서 여막을 짓고 효성을 다하여 역시 백죽이 난 상서가 있어서, 군수 양반(楊蟠)이 그 마을을 표창하여 ‘효렴방’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서씨 집에 대가 난 것도 한 상질의 변이(變異)이오니, 그의 높은 정절을 표창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함으로써 후세의 사람들을 권장하게 하옵소서.3)

 

백호(白虎)와 흰 사슴(白鹿)을 영물로 여긴데서 알 수 있듯, 옛 선조들은 흰색을 특별히 상서롭게 여겼으며, ‘흰 대나무의 이적’은 중국의 고사와도 비견되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장계를 올린 당일에 정려와 복호를 명하고, ‘흰 대나무’를 그린 <백죽도>를 본 후 어제시(御製詩) 2 수를 하사한다.

이러한 사실이 나중에『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4),『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5),『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6) 등에 실리며, 문중 및 부친이 소장하고 있는 가첩(家牒)과 문적(文蹟), 그리고 비문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정려각과 <백죽도>가 불타버려, 영조 7년(1726년)에 다시 그려 보관하던 중 그림이 낡아 정조 때에 마침 지금의 경상도 영천 신령면에 위치한 장수도 찰방(長水道 察訪)7)으로 와 있던 이명기에게 부탁하여 중모(重摹)한 그림이 바로 <열녀서씨 포죽도>다.8) 이명기는 이 그림을 그린 후 「포죽도 중모기」와 「포죽도 을묘 중모시 운」이란 칠언율시를 썼다.

 

<포죽도 중모기抱竹圖 重摹記>

영남은 본래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고장으로 9) 일컬어져 예로부터 정승 판서 등의 이름난 높은 벼슬아치와 도학, 충의, 절효(節孝)의 선비가 전후로 계속 배출하여 빛나는 전적典籍과 현자賢者가 많은 최고의 고장이 되었다.10)

나는 지난 계축년 여름에 역참을 관리할 것을 명받았지만 역의 공무가 쌓이어 단 한걸음도 문밖에 나가서 아름다운 명승지를 구경할 겨를이 없었으나, 때때로 시골 선비들에게 새로운 것을 많이 듣게 되었는데, 감동할 때가 많았다.

이번에 석사 도필구가 두루마리 한 폭을 갖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다시 모사하는 일을 부탁하므로 삼가 받들어 펼쳐보았더니, 곧 그의 선조비先祖妣 정부인 달성 서씨의 <포죽도>였다.

장헌(세종)대왕의 시도 여기에 게재되어 있어 두 손으로 받들어 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리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나라에서 절의를 장려하고 교훈과 가르침을 붙들어 심어 백세에 없어지지 않는 덕을 드리운 것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이 어찌 도씨 한 집안 만의 영광이겠는가? 아마도 세상의 도리를 위해 다행한 일이니 아 훌륭하여라! 그 흰 대와 눈 속의 붕어가 정성스런 효도의 감동으로 인한 것이니, 이 사실이 모두 『삼강행실도』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 감히 글을 덧붙일 수 없도다.

훌륭하도다. 도씨의 집안에는 어쩌면 그렇게 절의가 많았던가? 이 일에 나도 참여하는 영광을 얻은 것이니 어찌 감히 거절하겠는가? 즉시 일어나서 손을 씻고 삼가 모사하여 돌려주며 드디어 이를 위해 중모기를 쓴다.

통훈대부 행 장수도 찰방 이명기 삼가 씀.11)

 

<포죽도 을묘 중묘시 운(抱竹圖 乙卯 中摹詩 韻>

위나라 무공은 원래 군자의 덕이 있어, 기원의 푸른 대가 아름답게 우거졌고

주나라 목왕은 잠깐 선가와 인연 맺어, 황죽시 3장을 지어 세상을 울렸도다.

아황과 여영의 대는 피같이 붉어, 천 년 세월 창오의 땅은 상수 원수를 대하고

맹종의 대(죽순)는 눈 속을 뚫은 기운으로, 특별히 하늘 맨 끝에서 뿌리가 돋아났네.

서씨의 곧은 절개는 사덕을 고루 겸해, 대나무 이적으로 오산에 새로운 정려문 세웠으니

잎은 서릿발 같고 줄기는 옥 같아 마디마디 깨끗하여 아무런 흠 없도다.

남편 죽음 슬퍼하자 하늘이 흰 대 나게 하고, 효도는 능히 하늘에서 붕어 떨어지게 하니

마음 속 깊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구나.

구중궁궐까지 이적 알려져 그림 그리게 되니, 찬란한 임금 은혜 크고도 크도다.

우주의 텅 빔에서 밝은 빛 생겨나 비추니, 언제나 사람이 지켜갈 도리는 어둠에 기대지 않으리.12)

 

1950년에 부친이 대구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입한 『정부인 달성서씨 사적』에 위의 내용이 실려 있다. 「포죽도 중모기」를 통해 이명기가 조선 정조 때의 계축년인 1793년 여름에 장수도 찰방으로 부임했음을 알 수 있다.13) 이명기가 찰방을 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으나14) 어디서 찰방을 지냈는지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 없다. 따라서 이 사적은 그가 장수에서 찰방으로 재임했음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15)

<열녀서씨 포죽도>는 1795년(정조 19년) 그의 나이 40세 때에 그린 것임을 그림 좌변에 적혀 있는 ‘숭정후 3을묘(崇禎後 三乙卯)’16)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명기의 「포죽도 을묘 중모시운」은 그가 중국의 역사를 깊게 알고 있음은 물론 『시경』에 나오는 구절이나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시에서 영향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를 통해 조선시대 화원들이 그저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가 아니라 매우 수준 높은 인문학적 교양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기록에서 역시 조선시대는 충효와 정절이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의 근간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선초부터 무엇보다 충효와 정절을 기리는 정책을 폈고, 그래서 서씨와 관련한 이적을 열녀의 표상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제작은 물론 숭현 사상(崇賢思想)의 표본으로 공신들의 초상들도 그려졌고, 이를 진전(眞殿)이나 사당 및 영당에 모시고 향사(享祀) 첨배(瞻拜)하면서 가문의 정서를 공유하는 삶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열녀서씨 포죽도>처럼 조선시대에 관이 아닌 민간에서 여성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이를 족자로 꾸며 자손 대대로 기림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거의 유일한 예다.

 

 

<열녀서씨 포죽도>의 내력과 예술세계

 

앞의 이명기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듯 <열녀서씨 포죽도>는 누구의 그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숭정후 병오 중춘(崇禎後 丙午仲春)에 그린 원본 그림이 낡아 이명기가 다시 그린 것이다. 19)

화면 최상단에는 『속삼강행실도』에 나오는 서씨 이야기와 세종대왕 어제시를 붉은 세필의 선으로 윤곽선을 그어 행초서로 쓰여 있는데, 이명기가 직접 쓴 것인지는 향후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20)

<열녀서씨 포죽도>의 계보는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 그림의 공통점은 한 결 같이 도식적인 3단 구성법을 구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상단은 세종의 명에 의해 그려진 포죽도 족자 그림을 펼치고 있는 장면, 중단은 열녀서씨가 대나무를 움켜 안고 통곡하는 장면, 하단은 집안에서 열녀서씨가 곡을 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열녀서씨 포죽도>는 열녀서씨의 행적에 관한 장면만 집약적으로 묘사한데다 모필화이기 때문에 인물산수화의 특색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명기는 그가 주력한 초상화 외에 10여점의 인물산수화를 남겼다. 그리고 그의 산수인물화 중 연대와 그린 시기가 명확한 기년작은 <열녀서씨 포죽도>가 유일하다.

 

<열녀서씨 포죽도>는 전체적으로는 조선 후기 화풍인 남화적 요소, 즉 우리 역사상 가장 문예가 발달했던 시기인 조선 후기 진경시대의 화풍이 두드러지면서도 조선 중기의 그림을 임모한 그림이어서 정교한 사실성이 두드러지는 북화적 요소도 보인다. 예컨대 전경의 집을 그린 도식적 기법이 그러하다. 흰 대나무를 기록에 남아 있는 대로 8포기로, 또한 저장(苴丈), 즉 상중(喪中)에 짚었던 대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돋았다는 일화를 근거로 저장을 집 거실 안에 그려놓고 있는 것도 사실성에 충실한 북화적 요소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들은 남화적 기법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원경의 산을 ‘미점준(米點皴)’21)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남화풍으로 조선 후기 겸재 정선 이후의 그림에서 흔히 구사되는 기법이다.

얼핏 보면 이 그림은 하나의 단일한 시점에서 그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그림은 크게 세 경군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림의 하단인 근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의 시점에서 세부를 들여다보게 하고, 중경과 원경은 공간의 높이와 넓이를 표현하고 있다. 단일한 관점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다시점(多視點), 즉 복합시각을 구현한 그림인 것이다.

 

우리의 옛 글씨나 그림의 바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즘 흔히 쓰는 화선지와는 확연히 다른 종이다. 특히 <열녀서씨 포죽도>는 잘 다진 장지에다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일점 일 획에도 먹과 채색의 농담이 화가의 감성과 붓질에 따라 그대로 섬세하게 드러나, 이러한 점이 화면을 다채롭고도 미묘하게 한다. 예컨대 이 그림에서는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목의 나뭇잎과 양쪽 길 가의 대 숲이나 언덕 위 대 숲에서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근경 중경의 나뭇가지와 잎의 묘사 방식을 보면 당시에 활동했던 선배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산수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22) 그렇지만 능숙한 필치로 준법을 구사하여 화면을 다질적인 공간으로 보이게 한다.

조선 후기의 그림들은 조선 전기의 관념적 산수와 달리 진경적 사실성이 두드러지는데, 이 그림에서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다양한 준법으로 그린 수목의 표현이 그 단적인 예다. 그래서 수목 사이 바탕에 옅은 바림(채색)이 가해지는 것도 이 시대 회화의 특성으로, 이 그림도 바림으로 인해 담백하면서도 유현한 기품이 느껴진다.23)

 

무엇보다 이 그림은 대숲이나 울창한 나무와 대조적으로 그림 중 상단 가운데의 넓은 들판을 텅 빈 바림으로 처리함으로써 투명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느끼게 한다.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그 끝에 흰 대나무가 있고 그 너머 텅 비고도 꽉 찬 아득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이 공간은 이승의 대숲과 멀리 보이는 무덤(저승)사이에 있다. 이 여백은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이다. 이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깊은 감응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열녀서씨 포죽도>는 조선시대 후기 그림으로는 색채를 풍부하게 구사한 그림이지만 수묵화의 기본 특색인 짙음과 옅음, 즉 농담(濃淡)의 변주로 그린 그림이다. 결국 <열녀서씨 포죽도>는 시대와 역사를 충실히 반영한 전통회화로서, 또한 그 기의를 넘어선 다른 감응의 지평을 포함하고 있다. <열녀서씨 포죽도>는 예술세계가 그러하듯, 당대의 의식(記意) 너머 존재하는 무한한 기표(記標)의 세계이다.

 

 

“전신傳神”을 구현한 이명기의 초상화

 

이명기의 아버지는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종수(李宗秀)이며, 그의 장인인 복헌 김응환(復軒 金應煥, 1742-1789)도 당시 유명한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래서 이명기는 어릴 때부터 그림 수업이 가능했고 체화했던 것이다. 이명기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것도 이러한 집안 배경에서 가능했으며 20대 후반에 국내 제일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친다. 이는 이명기가 약관 28세 일 때에 정조가 강세황의 71세 초상화를 그리게 할 때 “왜 이명기에게 그리도록 하지 않는가?”라고 하거나, “이명기는 당대에 독보일세(獨步一世)로서 문무 고관들이 모두 그에게 초상화를 맡겼다”24)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명기는 두 차례나 정조(正祖)의 어진을 그리며,25) 또한 정조의 명으로 김홍도와 함께 사도세자를 위한 용주사(龍珠寺) 대웅보전의 불화를 그렸다고 한다.26)

이명기는 1791년(정조 15년)에 이어 1796년에 두 번째로 정조의 어진(御眞)을 그리고17), 또한 이 해 여름에 김홍도와 함께 <서직수徐直修(1735~?)상>18)을 그렸다.

장수도 찰방이 되어 지방으로 내려와 있던 1794년에도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초상을 이명기에게 그리게 한 것으로도 27) 그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중국이나 일본과 어떻게 다른가? 중국의 초상화는 과다한 장식적 배경까지 함께 그리거나 남녀 군상 및 조상들을 함께 그리는 것이 주된 특성이라면, 일본의 초상화는 인물의 표정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28) 이에 비해 조선의 초상화는 극사실적 묘사력29)을 보여 준다.30) 이러한 사실적 묘사력은 당대로선 전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초상화들이 대상의 외형만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고개지 이래 동양 전통화론의 본질이 된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상의 외형 뿐 만 아니라 대상의 내재적인 본질까지 표현하려 한 전통화론의 주된 화두이다. 그러므로 초상의 잘됨과 못됨의 기준은 ‘전신’에 있었다. 중국에서 전신사조론이 출현했지만 중국에서는 후대에 이를수록 전신이 지닌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버리며, 전신사조의 진면목은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더 실감할 수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전통미술사에서 특별한 지위를 점유하며, 그 정심(精審)한 기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가가 이명기다. 그의 나이 37세 때인 1792년(정조16년)에 그린 <번암 채제공의 73세 초상>31)은 천연두를 앓은 흔적인 곰보 자국은 물론 사팔뜨기의 눈까지 그대로 그릴 정도로 사실적이다. 뿐 만 아니라 속옷 색까지 얼비치는 의습의 묘사도 절묘하여 그가 남기 초상화 중에서도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유언호 상>, 그리고 1796년에 그린 <서직수 상>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32)

이명기의 초상화는 한 결 같이 담담하고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는 의연한 성정을 드러내고 있어 초상을 보면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그림을 보면 절로 선조들의 올곧은 삶을 생각하게 된다.

 

 

맺음말

 

이명기는 극진한 필력으로 묘출한 그의 초상화는 올곧은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기질과 내면적 성정, 품격을 여실히 보여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가이다.

이명기는 다수의 인물산수화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이명기의 유일한 기년작 산수인물화인<열녀서씨 포죽도>는 당대의 사회적 이념이 반영된 그림이다. 대나무를 사랑했던 선조의 이른 죽음과 그로 인한 한 여인의 애틋한 정한으로 인해 어느 날 홀연히 하얀 대나무가 솟아나는 사건에 대한 의미 부여는 당대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 반영이다. 그렇지만 실록에도 기록된 ‘백죽’에 얽힌 사연은 그 족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시지각적 기호와 도상을 통해 면면히 후손들에게 각인되기 때문이다.

<열녀 서씨 포죽도>는 우리 전통회화의 주요 특질인 옅음(淡)과 짙음(濃), 즉 허/실(비움과 채움)의 미묘한 변주를 보여준다. 허/실은 바로 우리 삶의 온갖 사연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공간이다. 또한 이명기의 <열녀서씨 포죽도>는 격식과 의례를 중시한 초상화와 달리 무한감과 다질적인 준법으로 시지각적, 또는 물성적 특성상 이념을 넘어선 무한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열녀서씨 포죽도>의 진가는 감성적 기표에 있다. 우리는 ‘기의’로 헤아릴 수 없는 역사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2012년 10월 5일)

 

 

각주)

1) 강세황(1713~1791)의 아들인 강관(1743~1824)이 <강세황 71세상>(보물590-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그리게 된 내력과 제작 일정을 자세히 기록한 글이다.

2) 열녀 서씨에 대한 옛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20년 7월 기해조)』,『속삼강행실도』,『신증 동국여지승람』,『정부인 달성써시 사적』,『청송당 도선생 실기,1890』,『영남읍지(1832년)』,『경상북도 읍지(1895년)』, 『조선환여승람』등이다.

3) 『세종실록 20년 7월 기해조(17일)』 慶尙道監司曰, 軍威人 都雲奉, 植竹後園, 每日玩賞, 雲奉死。其妻徐氏, 年二十八, 朝夕就園抱竹, 哀慕常如始, 死者十七年, 一日白竹生於後園。昔皇英泣湘班竹生, 宋仰忻, 盡孝廬墓, 亦有白竹之瑞, 郡守楊蟠表其里, 爲孝廉坊。今徐氏堂後生竹, 亦變常質, 以表素節旌門復戶, 以勸後來。

4) 성종 13년(1382년)에 편찬된 조선전기의 종합인문지리지임.

5) 중종 9년(1514년)에 편찬됨.

6) 광해군 6년(1614년)부터 7년 사이에 편찬됨.

7) 장수(도)는 지금의 경북 영천 신령면에 있었던 역이다. 찰방은 오늘날의 역장 및 우편국장 격으로 대개 30리 거리마다 설치된 지역의 역을 관장하며 당시의 교통수단인 역마의 관리 및 국가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했다.

8) 임진왜란 때 불탄 백죽각은 18세기에 다시 중수하고 새로 비를 세우는데, 이때 중수 비문을 쓴 이가 당시 선산 부사로 와 있던 이채(李采,1745~1820)였다. 이채는 김창협의 문인으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암 이재(陶菴 李縡, 1680~1708)의 손자다. 이런 사실로도 조선시대는 열녀의 정절을 매우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채를 그린 작자미상의 초상화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초상화로 꼽힌다.

9) 원문의 ‘추로지방’은 추(鄒)나라는 맹자의 출생지이고 노(魯)나라는 공자의 출생지이니, 이 사자성어는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고장’이란 뜻임.

10) 한자 원문의 文獻之最라는 말의 ‘문헌’은 여기서는 옛날의 문물과 제도의 연구 자료가 되는 책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적과 현자’를 의미함.

11)「抱竹圖重摹記」嶺南素稱鄒魯之邦, 自古名公巨卿道學忠義節孝之士, 後先相繼蔚然爲我東文獻之最矣。余於癸丑夏膺, 命攻駒於是郵公務氄集 不暇出門外一步地以, 攬作勝之奇時從鄕士大夫益聞其興感者多矣。今星州都碩士必九甫, 持一幅來視 要余以重摹之 役奉以展之卽其先祖妣貞夫人達城徐氏抱竹圖也。莊憲大王宸章奉揭焉 雙擎莊讀欽頌感祝盖見, 祖宗朝崇獎節義扶植風聲垂百世不沫之盛德此豈, 特爲都氏一門之榮抑, 亦爲世道之幸, 嗚呼! 盛我其白竹雪鯉誠孝所感之由具載於三綱圖, 今不敢贅筆而異矣。休哉, 都氏之門何其節義之多也. 斯役也余與有榮矣豈敢辭焉. 卽起盥手敬摹以歸之, 遂敢爲之記. 通訓大夫 行 長水道 察訪 李命基 謹書. 『貞夫人達城徐氏 事蹟』(都永桓 소장), 27-29쪽. 이 글은 그가 쓴 <포죽도 을묘 중모시운>과 함께 이명기가 남긴 유일한 기록으로 보인다.

12) 衛武老有君子德 猗猗綠竹生淇園

周穆暫結仙家緣 黃竹歌聲動地喧

皇英之竹色如血 千載蒼梧對湘沅

孟宗之竹氣凌雪 特地挺出根天根

徐氏貞節兼四德 竹亦梧山別立門

葉如雪刃竿如玉 節節皎然無玷痕

化石崩城白受來 孝能隕魚膓我猿

九重名徹繪後素 燠爛宸章大裁言

照耀宇宙虛生白 萬古綱常顂不昏, 도영환 소장, 같은 책, 29-30쪽

 

13)『承政院日記』,「乾隆五十六年辛亥 十月 初七日戊申晴.....未時」.....“上.....別下傳敎 主管畵師 司果李命基 同參畵師 氷庫別儉金弘道 相當職除授 주상께서 전교를 내리시되 主管畵師 司果 이명기와 同參畵師 氷庫別檢 김홍도에게 상당하는 직책을 제수하라.” 오주석, 「화선 김홍도, 그 인간과 예술」,『단원 김홍도』(삼성문화재단, 1995) 84쪽에서 재인용. 이 기록은 1791년에 이명기는 주관화사로 어진을 그렸기(御眞圖寫) 때문에 정조가 전교를 내린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명기는 이때 어진을 그린 공으로 1793년 장수 찰방을 제수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논문을 쓸 때만 하더라도 이명기에 대한 선행연구가 없어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후 2007년에 장인석의 명지대 석사학위 논문에서 선행연구논문인 나의 논문을 근거로 『일성록』과 『장수역지』「선생안」을 찾아 그의 재임 기간을 밝혀 내었는데, 그의 논문에 의하면 이명기는 1973년 5월(음)~1975년 8월(음)까지 2년 4개월간 장수도 찰방으로 재임했다. 장인석, 『화산관 이명기의 회화에 대한 연구』,2007, 10-11쪽 참조

14) 오세창이 편저한 『국역근역서화징』(시공사, 819-820쪽)에 보면, 이명기가 찰방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5)그의 호인 화산관도 장수도 찰방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장수도 찰방이 있는 영천의 주산이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머문 인각사가 있는 절로도 유명한 화산(華山)이 있다. 그의 나이로 보아 이 무렵에 아호를 정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16) ‘숭정후 3을묘’는 명 숭정제(1610~1644)사후 3번째 을묘년이란 뜻이며, 이 해는 서기로 1795년(정조19년)이다.

17)이명기는 36세 때인 1791년에 10년 이상 선배이자 스승격인 김홍도와 신한평을 제치고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일을 총괄하는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첫 번째 어진을 그렸으며, 그의 나이 41세 때인 1796년에도 정조의 어진을 그린다.

18)얼굴은 이명기가 그렸으며 의습은 김홍도가 그린 전신상이다. 이 그림은 인물의 기질까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인 뛰어난 얼굴 묘사와 부드럽고 섬세한 옷 처리가 조화된 합작 초상화로서 조선시대 인물화중 걸작의 하나다.

19) 서기로는 1726년(영조 2년)이며,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원본은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구도의 「포죽도 후서」에 따르면, 이 해에 새로 그렸다는 기록이 없고, 전해오는 그림이란 뜻의 ‘유도遺圖’라는 구절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726년 이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20)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徐氏豊基人, 郎將思達之女, 嫁同郡都雲峯, 纔數歲夫死,

哀毁過禮, 常日就堂後竹林, 抱竹號泣, 忽一日生白竹三叢, 三年至七八叢。正統戊午,

莊憲大王名圖, 白竹以進, 復戶旅閭, 御製詩,

號天抱竹涕汍瀾 一夜新篁白數竿 高節凜然驚世俗 九重描上畵圖看

千古瀟湘怨不窮 年年竹上見斑紅 須知素節無今昔 白笋新生一兩叢 右見三綱行實

21) 송대의 화가 미불(米芾)이 창안한 화법으로 먼 산의 숲을 점에 가까운 선으로 그린다 해서 ‘미점준’이라 함.

22) 특히 이명기의 <미불배석도(米芾拜石圖>나 <관폭도>를 보면 김홍도의 <채약우록지도(採藥友鹿芝圖)>와 그 필법이 유사하며, 그림 상단에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는 글이 쓰여 있다.

23) 이 시대의 화가인 강희언(澹拙 姜熙彦)이나 이인문(李寅文, 1745~1821)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이러한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다.

24) 命基以善寫眞 獨步一世 文武卿相悉求於此人. 「癸秋記事」,『표암 강세황 도록』, 20쪽

25) 두 번째인 1796년에 어진을 그릴 때의 정황이『근역서화징』에 실린 「금릉집」편에 나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조 병진년(1976년)에 왕이 집복헌에 거동하여 화공 이명기에게 어진을 그릴 것을 명하고 규장각 학사인 서용보, 이만수, 이시원, 남공철에게 날마다 돌아가며 대궐에 들어와서, 어진 그리는 일을 감독하게 하여 그림이 완성되자 이에 네 신하에게 각각 모사본 한 벌씩을 내려주셨다. 그 때 원자(세손)와 함게 보시고 그 얼굴과 수염이 꼭 같게 되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 때마다 돌아서서 웃으시곤 했고, 그 족자를 대궐 안에 보관하게 하셨다. 경신년(정조 24년, 1800년)에 상감이 승하하시자 그 뒤에 어진을 네 신하 집에 돌려주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의 일이다.

26) 1790년은 그의 나이 35세 때이며, 이 불화를 그릴 때 김홍도 이명기도 참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불화는 최초로 서양화 기법인 음영법이 구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그림은 종교화라는 점, 또한 그 기법적 특성으로 보아 김홍도 이명기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무엇보다 20세기에 와서 덧칠을 했기 때문데 김홍도나 이명기의 화법적 특성을 발견할 수 없다.

27) 원본을 이모함.

28) 중국과 일본의 초상화에 대해서는 아주문물학회에서 간행한 『위대한 얼굴전 도록』(2003) 참조.

29) 그래서 피부과 의사인 이성락 박사가 우리 초상화를 보고 피부병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이나 일본의 초상화를 통해서는 이러한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하며, 이를 통해서도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그려졌는지 알 수 있다.

30) 조선시대의 초상화에 간략하게 일별할 수 있는 논문은 이태호의 「초상화」,『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학고재, 1999) 288-321쪽과, 조선미의 「한국 초상화의 사적 개관」,『위대한 얼굴전 도록』(앞의 책) 162-177쪽 참조.

31) 오주석은 그의 논문에서 임금의 초상을 그린 해인 1791년에 그린 것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1791년 가을에 어진이 그려졌고, 초상화에 체제공의 73세상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채제공이 1720년생이므로 1792년(초)에 그린 것이다.

32) 서직수 상을 그린 1796년 이후 이명기의 행적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으며, 화원들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던 자비령 대령 화원에도 1800년 이후에는 이명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성록』에 1802년 8월 선원전을 수리하여 양지당 및 규장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숙종, 영조, 정조 등 선대의 초상화를 이전 봉안할 때, 이 작업과정에 이명기가 참여하지 않자 순조는 이전까지 어진제작 등의 공로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영원히 사과벼슬에 봉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장인석, 같은 책, 14-15쪽 참조

 

 

* 이 논문은 2004년에 쓴 「화산관 이명기의 <달성서씨 포죽도>와 “전신”에 대한 소고」,(『성주도씨 대종친회 회지』제19호, 2004)와, 「<열녀서씨 포죽도>」와 이명기의 그림세계, (『나와 너의 세계 美術』, 글을 읽다, 2007)를 2012년 10월 7일에 수정 보완한 것임.

 

자료출처 : 대안미술공간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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