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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일(神逸)의 유명(幼名)은 만주(萬周)라고 불리는데 그는 기자(箕子)의 四十세손(世孫)인 기준(箕準)의 후손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이천(利川) 땅 서아성(徐阿城)에 자리잡은 것이 서씨의 시초라는 것.

기준의 칠대손(七代孫)에 만주라는 이가 효양산(孝養山) 밑에 살았다. 하루는 효양산 기슭에 있었는데 어디서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화살을 맞은채 달려와 만주 앞에 쓰러 졌다. 만주는 가엾게 여겨 숨겨 주었고 잠시뒤 사냥꾼이 쫓아 왔으나 사냥꾼은 사슴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만주는 사냥꾼이 가버리자 사슴의 다친 상처를 치료하여 놓아 주었다. 그 날밤 꿈속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사례하며 말하기를 사슴은 내 아들인데 그대에게 의지하여 죽지 않았으니 마땅히 공(公)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게 하리라 하고 이어서 말하길 그대가 죽으면 내 아들을 살린 그 자리에 묘를 쓰도록 아들에게 일러 주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고려사 열전 권 제七 서희전(徐熙傳)에 있고 그 원문을 옮겼습니다

- 神逸郊居有鹿犇投神逸拔其箭而匿之獵者至未獲而返夢有神人謝曰鹿吾子也賴君不死當令公之子孫世爲卿相神逸年八十生弼弼熙訥果相繼爲宰相 -직역하였습니다.

- 신일이 교외에 살 때 화살 맞고 달아나는 사슴이 있어 신일이 그  화살을 뽑고 사슴을 숨겨 주었고 사냥꾼이 이르러 사슴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신일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사례하여 말하기를 사슴은 내 아들인데 그대에게 의지하여 죽지 않았으니 마땅히 공의 자손들로 하여금 경상이 되게 하리라 하였다 신일이 나이 팔십에 필을 낳고 필, 희, 눌이 과연 서로 이어서 재상이 되었다. -

 

그후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그 곳으로 사냥을 나왔고 몇 일간을 만주가 길 안내와 몰이꾼으로 문성왕을 모시게 되니 이때 만주는 문성왕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 사냥을 마치고 환궁할 때 만주는 서씨(徐氏)로 사성(賜姓)받고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만주는 사슴을 살려준 후 신(神)의 가호로 안일(安逸)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神逸)로 고쳐 불렀으며 그 후 장가들어 나이 팔십에 이르러 아들 필(弼)을 낳으니 이때부터 서씨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신일의 아들 필(弼)이 고려 광종(光宗) 때의 현신(賢臣)으로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에 이르렀고 필의 아들이 명신(名臣) 희(熙)다. 서희는 광종때 대과에 급제하여 성종조(成宗朝)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국교를 다시 트고 송태조(宋太祖)로 부터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의 벼슬을 제수받고 귀국했다. 성종 12년(993)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중군사(中軍使)로 출전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므로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서희는 극력 반대하고 서경 이북 땅의 할양(割讓)을 요구하는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여 마침내 그를 설복(說服)시켜 서경 이북의 땅을 지키고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이 압록강을 경계로 확정지어 지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서희의 아들 눌(訥)은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 왔고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을 거쳐 국자좨주(國子祭主) 를 지냈으며 그의 딸이 왕비가 되자 덕종초(德宗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삼중대광내사령(三重大匡內史令)에 올랐고 자손에게 영업전(永業田)이 하사 되었고 정종(靖宗)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다.  

 

일설에는(최두선 찬 아간공 신도비명/崔斗善撰阿干公神道碑銘) 신라 말기 아간의 벼슬을 지낸 서신일은 신라의 조정이 이미 소인(小人)들이 우굴거리고 왕의 귀를 어지럽게 하며 충신을 질시(嫉視)하여 모든 모함이 공(公)에게 모임으로 장차 국가에 큰 화가 닥쳐올 것을 미리 알고 이천 땅 효양산에 은거(隱居)하며 자연과 더불이 벗을 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이 때에 불도(佛道)가 너무 심하게 날뛰고 그 폐습이 백성을 괴롭히고 있음을 우려하여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이니 제자가 날로 늘어났다. 그 때 공의 나의 74세였다. 공이 후사(後嗣)가 없고 일찍 부인과 사별하여 정상이 참혹하므로 동생 신통(神通)이 그의 아들 목(穆)을 후계로 삼을 것을 권하였으나 부자(父子)의 천륜(天倫)을 빼았는 것은 인정이 아니다 하고 듣지 않으니 제자들이 간언하기를 장차 홀로 계시다가 돌아가시면 훗날 제향을 의탁할 후손이 없을뿐 아니라 가계가 끊어질 것이니 이에 대비함이 좋을 것이라 하므로 공이 이에 응하고 드디어 합천홍씨(陜川洪氏) 찬(贊)의 딸을 맞이 하였다. 하루는 산골짝에서 지팡이를 짚고 소요(逍遙)하고 있을 때 -이하 앞의 만주(萬周)가 겪는 이야기와 같다- 그 일이 있은 후 하늘의 도움인지 부인이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고 2년후에 82세로 눈을 감으니 효양산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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